지난 토요일 친구와 함께 예술의 전당에 갔다. 남부터미널역에 도착한 시간이
마침 점심 때여서 근처에 알고 있던 식당에 가서 요기를 하고,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관 주도형 건축물의 전형인 예술의 전당은 역시 고압적인 모습으로 떡
버티고 서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남부순환도로로 절단된 진입부하며, 미
로를 방불케 하는 통로는 늘 여기를 찾을 때마다 약간의 부담을 주곤 한다.
안내판을 보니, 퓰리처상 수상작 전시회 말고도 ‘성서 유물전’과 ‘앤서니 퀸
부자 전시회’와 ‘무슨 협회 전시회’인가를 하고 있었다.
우선 관람표를 사서 전시관에 들어섰다. 한 사람당 5000원의 관람료를 내고 들
어서며 “문화생활도 돈이 있어야 누릴 수 있으니 원…”하고 입맛을 다시자 친구
는 그저 빙그레 웃는다.
관람객은 제법 많아 입구에서 줄을 지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사진들 옆에 있는
작은 설명을 통해 사진의 내용과 그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시관 바깥의 로비에는 몇몇 굵직한 사건들이 보도될 때의 신문이 전시
되어 있었는데, JFK의 암살범인 오스왈드가 범행 후 이송될 때 저격당하는 장면과
월남전당시 ‘사이공식 처형’장면을 실은 사진이 게재된 신문이 놓여 있었다.
알다시피 퓰리처상은 Journalism과 Letters, Drama and Music의 영역에서 선정되
며, 이 전시회에 실린 사진들은 피쳐 사진부문(Feature Photography)의 수상작들로
Journalism 영역에 속하며, 한해 전과 그해 시상전까지의 일간지에 실린 사진 중에
서 선정된다(퓰리처상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http://www.pulitzer.org를 참조).
전시실은 1940년부터 10년 단위로 구분하었고, 각 시대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
건을 열거하여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전시실의 주된 톤은 검정
과 빨강, 그리고 흰색이었고, 전시된 사진은 모두 검정색 나무액자에 싸여 있었다.
늘 그렇듯이, 미술관은 도서관이나 교회나 성당처럼 뭔가 엄숙한 분위기를 띈
다. 그것은 바깥에서 마음껏 재잘거리던 소녀들도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면 잠잠
해지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 관람공간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부분의
대화가 속삭임으로 변했다.
1942년부터 1998년에 이르기까지 한 점씩(때로는 두세 점씩) 걸려있는 사진들은
그 해를 대표하는 ‘결정적 순간’을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사진들을 돌아보며, 문인은 그가 쓴 글로 자신의 사상을 나타내고, 농부
는 자기가 기른 작물로 그 정성을 표시하며, 기술자는 그가 만든 제품으로 자신을
대표하듯이 사진기자는 그가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팜플렛에 쓰여진 대로 그 사진 한 장 한 장이 반전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
고,식량원조에 대한 여론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사진 한 장이 가
지는 위력이 얼마만큼 큰 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사진들은 나에게 인류의 끝없는 폭력과 인종차별, 자유에의 항거와 무력진압,
전쟁과 비극, 박애와 사랑에 대한 말없는 웅변으로 다가왔다. 어떤 사진 앞에서는
정말 눈시울이 뜨거워 졌고, 어떤 사진 앞에서는 전쟁의 황폐함과 더불어 인간의
광폭함과 잔인성에 치를 떨었고, 어떤 사진 앞에서는 사진 속의 인물의 웃음에 동
참할 수 있었다. 사진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찍힌 것들 뿐만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장면을 찍은 것도 많았으며, 화재 현장에서 찍힌 사진도 제법 많이 보였다.
1950년도 위치에 걸려 있는 사진에서 중공군의 남하로 인해 끊어진 다리 위로 대
동강(많은 이들이 한강다리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Daedong river이다)을 건너 남하
하는 피난민의 행렬을 보며 4백만명의 사상자를 가져온 한국전쟁의 단면을 볼 수
있었고, 미국의 인종차별문제, 미국의 월남전 개입과 미국의 반전운동, 제 3세계의
빈곤과 폭동, 남미와 중동의 학살과 처형, 동구권의 몰락, 중국의 민주화 운동 등
의 역사적 사건들을 사진을 통해 돌아볼 수 있었다.
1950년대였던가 60년대였던가, 사진 중에서 미국 소년의 학원에서의 총기난사에
관한 사진이 있었는데, 현재의 미국에서 문제시되는 것이 당시에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관습적
으로 행해지는 여성할례의 모습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면도칼 하나로 행해지는 이
관습은 아무런 소독도 마취도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가져오며 때
로는 세균감염으로 인해 사망하기도 한다는 설명이 부연되어 있음을 보았다. 사실
책을 통해 읽은 것과 실제 고통을 참으며 앉아 있는 열여섯 소녀의 모습을 보는 것
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1998년도, 가장 마지막에 놓인 사진은 부모의 마약중독으
로 인해 고아 아닌 고아가 되버린 아이들을 주제로 한 사진이었다. 그 중 한 아이
는 이렇게 기도한다고 하였다. “제발 한번이라도 좋으니 제게 좋은 것을 가지게 해
주세요.”
사진의 대부분이 미국 일간지와 기자들에 의해 촬영된 것이었기에 미국의 시각
을 대변하는 사진들이 많았다는 아쉬움을 제외하곤, 묵직한 감동을 주는 전시회임
에 틀림 없었다.
나오는 길에 아트숍에 들러 엽서를 사고, 가락동으로 향하는 전철에 몸을 싣고
가는 동안에도 여운은 오래도록 남았다.
– 늘 즐거운 한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