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비가 많이 내리는 밤이었다. 창밖에는 빗물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대추나무 잎을 적시고 있었다. 현이는 블라인드를 약
간 젖힌채로 창문을 열었다. 비오는 소리가 한결 가까이 들려왔다. 현이는
소파에 앉아 석이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어쩌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
을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토요일 현이는 석
이와 함께 석이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부모님은 모두 따스하게
현이를 맞아주셨고, 고향에 온 듯 편안했다. 석이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내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데 오늘 점심을 먹고 문을 나서며 현이는 문득
내가 석이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이어서
현이의 눈앞을 가로막는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
추억이라는 기억의 창고 안에서만 꺼내볼 수 있는 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
고는 마음이 내내 편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잠이 들었을 이 시간에 현이가
깨어 있는 것도 그 이유였다. 현이가 아까부터 했던 생각은 정말 지독한 사랑
은 서로를 깨뜨리기 때문에 그 파괴적인 속성으로 인해 서로에게 환멸을 느끼
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은
차라리 ‘나’라는 자아를 그런데로 보존할 수 있지는 않을까? 침범당하지 않
는 자신의 영역을 가질 수 있지는 않을까? 현이는 이제 석이를 생각해 보
았다. 석이는 현이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상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반
면 그는 그 빈자리를 사랑으로 채우고 있었다. 현이는 석이를 정말 사랑하
느냐는 질문을 누군가가 지금 해온다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곧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주는 것
이며,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점에서 현이는
석이가 자신에게 하는 만큼의 사랑을 석이에게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이는 문득 석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아까 문득 떠올랐던
얼굴을 생각했다. 그 얼굴은 현이 옆에 없는 사람의 얼굴이다. 이제 그 얼굴
은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분산되었고, 현이는 왜 그들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를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 모습을 현실
과 비교해보는 존재라는 것을 현이는 느끼게 된 것이다. 현이는 자리에서 일
어나서 마치 떠오른 얼굴을 지우려는 듯 블라인드를 위로 끝까지 올렸다. 창
밖의 빗줄기는 어느덧 가늘어지고 있었고 노란색 가로등 불빛은 은은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현이는 석이를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석이를 사랑
하니?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마음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
오지 않았다. 하지만 현이는 아까보다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그리고 수첩을 꺼내서 메모를 적기 시작했다.
“내일: 석이에게 전화하기, ‘사랑해’라고 말하기, 그리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시작하기!”
– 늘 즐거운 한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