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휴가여서 오늘은 친구와 함께 극장에 들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를 봤다. 내 앞으로 두번째 왼편으로 네번째 자리에 ‘남자셋 여자셋’에 나오
는 ‘김진’이 매니저와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는 것이 보였다.
‘김진’이 앉은 주변 자리가 약간 술렁이더니 용감한(?) 여학생 하나가 사인
을 청했지만, 매니저가 뭐라 이야기 하자 그냥 자리로 돌아갔다.
개봉 첫날이어서 안성기와 박중훈, 최지우, 이명세 감독이 무대에 올라 차례
대로 인사를 하고 나서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예고편 없이 바로 상영이 시작
되었다. 과연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사전에 들은 평대로 공들여 만들어
진 영화였다. 중반 이후 약간 긴장이 느슨해지는 면도 있었지만, 걱정했던
최지우의 연기력도 제법 탄탄했고, 박중훈의 표정연기, 안성기의 눈빛연기,
장동건의 저돌성이 잘 어우러졌다. 이명세 감독은 그만이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요소(달, 낙엽, 안개, 바람, 구름, 비)들을 최적화시켜 스크
린에 담아냈다. 마치 슬라이드가 한장 한장 지나갈 때 망막에 그 장면이 각
인되듯이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은 기억에 남을 명장면이 되어 강한 잔상
을 남겼다. 영화 자체를 논하자면, 장광설을 늘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영화였
다.
즐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한 무리의 카메라 부대가 우리를 향
해 오더니 인터뷰를 하겠다는 것이다. 함께 인터뷰를 하라는 스텝의 권유를
부드럽게 거절하고 친구를 혼자 카메라 앞에 세웠다.
M모방송 리포터: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보고 나오시는 길인가요?
친구: 네.
리: 영화 어떠셨나요?
친: 지금까지 제가 본 한국영화 중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리: 점수를 준다면 100점 만점에 몇점을 주시겠습니까?
친: 95점이에요
리: 깎인 5점은 어디서 깎인 건가요?
친: 좀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네요.
리: 유령도 상영하는데, 이걸 보게된 이유는 뭔가요?
친: 지금 동시에 하는데, 둘다 볼 수는 없고, 이게 작품평이 좋게 나와 이
걸 보게 되었어요.
리: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뭐였나요?
친: 도입부분이요.
리: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친: 너무 떨리는데요.
리: 아니요. 잘해주셨어요.
친구는 인터뷰가 끝나고 나를 마구 때렸다. 왜 혼자 인터뷰를 하게 했냐고
그래서 나는 카메라가 안받는다는 둥, 내 몰골이 흉악해서 그런다는 둥, 말
재간이 없어 그런다는 둥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친구는 계속 부끄럽다며 자
기를 내세운 것에 대해 힐난했다. 나는 미안하다, 잘못했다 싹싹 빌면서,
인터뷰 한다고 티비에 다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염려하지는 마라. 그
런데 리포터와 주변 스텝의 표정을 보니 인터뷰가 잘 된 것 같기는 하다.
만일 그렇다면, 전국적으로 당신의 미모가 드러날 좋은 기회인데 뭘 그리 부
끄러워 하느냐는 둥 감언이설로 친구를 힘들게 다독인 후, 창덕궁에 가기로
하고 창덕궁쪽으로 향했다. 그동안 비는 계속 내려 둘이서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가는 것이 조금은 힘들었지만 이윽고 창덕궁에 이르렀다. 비가 오는 데
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고궁에 들어온 가족들의 모습과 연인들, 그리고 관광
객들이 눈에 띄였다.
고궁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솔숲과 여러 나무들이 우거진 녹색의 터널을 지
나는 것이 시원하게 느껴졌고, 비가 내리는 연못을 바라보는 것 또한 즐거웠
다. 빗방울이 동심원을 그리는 연못에는 푸른 연이 점점이 떠 있었고, 간간이
소금장이들이 물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궁을 돌아보는 동안
비틀린 향나무들과 계단식 정원, 그리고 수복강령을 기원하는 목각 등이 인상
깊었다. 내게는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하는 장소가 두 군데 있는데, 그
하나가 고궁이고, 다른 하나가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다. 시간이 많이
나지 않아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그 장소만이 가지고 있는 구별된 장소성은
나를 편안함으로 이끈다. 영화라는 동과 고궁이라는 정을 함께 맛 본 오늘 하
루는 그래서 멋졌다.
– 늘 즐거운 한빛.
PS. 창덕궁에서 비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안내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창덕궁에 오면서 비원에 간다고 쉽게 말하는데, 이는 주와 부가 바
뀐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원은 창덕궁의 일부인데, 일제시대 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앞에 세우고,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어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면서
왕궁이 일반에게 마치 동물원이나 공원처럼 인식되도록 했던 것이 아직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볼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