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에

지난 주에는 잠시 짬을 내서 그 며칠 전부터 하겠다고 벼르던
분갈이를 했습니다. 가을비가 오던 그날이었습니다. 저는 화
분에 담을 흙을 구하기 위해 뒷산에 올랐습니다. 작은 모종삽
을 움직여 흙을 고르고 비닐속에 담긴 화분에 옮겼습니다. 집
에 돌아와 이전 화분에 담겨 있던 파키라를 옮겨심고 물을 흠
뻑주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파키라는 ‘접속’의 여인 2의 창가
에 놓여있던 두개의 화분에 담겨있던 관엽식물이지요. 분갈이
를 하면서 파키라가 잘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오늘 집에 돌아
와서 보일러에 불을 넣다가 문득, 파키라 생각이 나서 창문을
열어보았습니다. 파키라의 윤기 나는 잎을 보면 늘 푸르게 살
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생명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지구상의 3천만종의 생물 가운데 한 개의 종, 그리고 그 50억
개체 가운데 하나인 제가 또 다른 하나의 생명을 바라보며 말
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임에 소중하고,
하나이기에 귀중한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소중한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은 학교에 가는 길에 시계줄을 갈았습니다. 선반 위에 한
동안 놓아두었던 시계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몸에서 나
는 심장소리 외에 또 하나의 소리인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소리
를 한동안 듣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대신 삐삐가 알려주는 시
간에 길들여져서 손목 위의 작은 무게를 덜어놓았던 것이지요.
아이작 아시모프는 디지탈 시계를 싫어했다지요. 그 이유를 묻
는 사람에게 그는 디지탈 시계에서는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
이라는 답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 제 손목에는 째깍 째깍 소
리를 내는 아날로그 시계가 부지런히 초침을 움직이고 있습니
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시계 바늘의 쫓기지 않는 부지런함
을 배웁니다. 만약 시계의 초침이 두 개여서 서로 쫓는다면 우
스웠겠지요.

오늘 저녁 산길을 넘어 집에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보다 조금
전에 산길을 넘어서 제가 집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선배가 그
길에는 밤중에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절대 없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산길로 접어들기 전에 제가 한 말을 다시 떠
올렸습니다. 그리고 ‘절대’라는 말이 타당할까라는 생각을 했
답니다. 오늘따라 산길은 유난히 어두웠습니다. 고갯마루가 가
까웠을때 앞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
리를 들으며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도리어 내
가 그를 놀라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조금 후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와 저는 만났습니다. 우린 아무
런 말 없이 그저 스쳤지요. 술냄새가 약간 풍겼습니다. 아무도
없을거라던 말을 한지 불과 몇분 사이에 누군가를 만났던 것입
니다. 역시 말은 함부로 할 것이 못되나 봅니다. 이사온 이후
로 불빛 없는 산을 계속 넘어서 집에 가곤 하는데, 산길로 접
어들 무렵 항상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이
길을 넘어보고 싶다. 이 산길을 맛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지
요. 산을 넘으면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안은 시가지의 야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비탈진 골목길을 걸어서 내려오면 하얀색 샤
시 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집에 돌아온 게지요. 주머니에서 열
쇠를 꺼내 문을 열고 방안에 불을 켜보면 눈에 익숙한 사물들
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냅니다. 책장에 놓여있는 토끼는 여전
히 저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오룡차를
한 잔 끓여 마시고 집을 나서야 겠습니다. 역시 집은 편안하고
아늑합니다. 좋은 밤입니다.

– 늘 즐거운 한빛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
To prove you're a person (not a spam script), type the security word shown in the picture. Click on the picture to hear an audio file of the word.
Anti-spam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