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녹차를 마셨더니 잠이 오지 않는다.
글쎄, 녹차를 마셨다고 잠이 오지 않을까?
잠이 오는 감기약을 먹었는데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 세라피에 따르면 잠을 억지로 자려고 하면 더 잠이 오
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잠을 자려고 애쓰지도 않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역시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
나오듯이 남자인 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약간의 흥분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
커피를 밤 늦게 마시면 심장이 벌렁거려서 잠을 못 이루곤 한다는 말을 실감
할 것 같다. 별로 기분 좋은 흥분은 아니다.
그끄저께, 다이어리를 정리하다가 친구가 메모해 준 포스트 잇을 발견하고, 거
기에 쓰여있는 책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뒤 학교 구내서점에 주문을 했다.
그제는 그 중 하나인 크리스티네 뇌스트링거의 오이대왕을 읽었다. 나는 오이
대왕이 그의 성격을 바꾸어 착한 사람(?), 아니 착한 구미-오리가 되는 것으
로 대미를 장식할 줄로 기대했었는데, 작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결말을 맺
었다. 역시 사람, 아니 생명체의 성격은 쉬 바꿔질 수 없는 것일까? 항상 모
든 글을 읽고 나면, 글에서 설명하지 않은 부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
증을 가지게 된다. 오이대왕이라는 이 책도 볼프강의 집 지하에 살던 구미-오
리들은 그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오이대왕은 새로운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볼프강의 다리는 어쩌다 부러졌을까? 자동차 보험회사 지하실에 살던 구미-오
리들은 디디티가 뿌려진 뒤 어떻게 되었을까? 등의 자잘한 질문들을 역시 만들
어 낸다. 하지만 이 책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료히 드러난 마당에,
그리고 이 책이 더 이상의 부연설명 없이 끝났다는 점을 볼 때, 이러한 질문들
은 후속편이 나오지 않는 이상 나의 머릿 속에서 재멋대로 굴러다닐 뿐이다.
어쨌건, 오이대왕은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이후로 꽤나 재미있
게 읽은 동화책(?)이 되고 말았다.
아, 그리고 절반쯤 읽던 이 동화책을 결혼식 피로연에 가져갔다가 어떤 아가씨
로부터 동화책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고, 아니요, 사랑합니다라고 짓궂게
대답했는데, 화제가 바뀌는 바람에 사실은 시를 더 사랑하지요.라는 말은 결국
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시를 통 못 읽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 잠을 못 이뤄도 여전히 늘 즐거운 한빛.